다시 천년을 기다리며

1998년 4월 1일. 오후 1시.
소설은 끝났다.
소설의 끝은 이러했다.
한 남자가 있었다.
또, 한 여자가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했다.
여자도 남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둘은 이별을 했다.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둘은 다시 만나기로 했다.
1998년 4월 1일 , 그들이 20일 동안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던 유일한 곳 북부방파제에서 12시에서 1시 사이에 만나기로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초여름 날씨라고 뉴스에서 떠들었는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 보니 비가 내리고 있다.

우산을 챙겨들고 시내에서 널 닮은 노란색 프리지어 꽃 한 송이, 꼭 한 송이를 샀다. 아주머니가 한 송이만 사서 누굴 줄려고 그러느냐 물었지. 그냥 웃고 말았지만 아주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다. ‘천년을 기다려 온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려고 그럽니다.’
남자는 생각한다. 어쩌면 우린 천년을 하루같이 오늘을 위해 준비해 왔을지도 모른다고...

바람이 몹시 세차다. 도저히 우산을 쓸 수가 없어 내리는 비를 그냥 맞고만 있다.

12시00분 아직 그녀는 도착하지 않았다. 비가 많이와서 그럴거야! 아님 차가 밀려서... 갈매기들이 비바람을 못 이겨 자꾸만 밀려간다. 바다로 바다로 나가려 날개 짓 하지만 자꾸만 밀려간다. 이때까지 갈매기를 보아왔던 수많은 나날들 중에 가장 슬퍼 보인다. 어쩌면....

12시02분 그냥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혹시나 그녀가 지금 어디 다른 곳에서 비를 맞고 서 있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12시12분 '춥다' 라고 자그마하게 외쳐본다. 흰색 세피아 한 대가 방파제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녀가...그녀가... 눈길을 돌릴 수 없어 차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연인이 비 바람치는 바닷가를 구경하러 온 모냥이다. 너무도 다정한 모습으로...

12시27분 바람의 세참을 무릅쓰고 노란 우산 하나가 선착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녀가 아닌 듯하지만 너무 외로워 혹시나 해본다. 역시나...

12시35분 춥다. 정말 춥다. 아마도 30분이 지나면서부터 일까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그냥 시간 한번 본 것...

12시41분 기다릴 수 있는 약속시간이 기다려온 시간보다 짧아진지도 한참이나 지났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 바람만이 방랑자되어 빠른 걸음 옮기고, 성난 파도 덩달아 덩실덩실 춤추고 있다. 묶여버린 배들과 나그네들은 그저 하염없이 멀리 희미해진 수평선만 바라보고 있다. 갈매기들은 왜 집이 없을까? 아니면, 집이 수평선 너머에 있는 것일까? 세찬 바람 뚫으려 날개 짓 더욱 힘차게 해보지만, 한참을 해보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 어쩌면 그녀도 지금 어디선가 힘찬 발걸음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어디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발이 시리다. 입술도 떨린다. 오늘따라 목덜미가 왜 이리 추울까? 비 맞는 것이야 좋아 하니깐 괜찮지만 바람이 불어 너무 춥다. 바람이라도 잔잔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바지주머니에 꽂아놓은 손은 따뜻한데... 그래서 그녀가 오면 두 손 내밀어 따스함 전해줄 수...

12시57분 이제 3분 남았다. 더 이상 시계를 보기가 싫구나. 시계를 괜히 들고 왔나 보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12시59분 57초 58초 59초...

13시00분 그녀는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너무도... 남자는 놓아두었던 우산을 집어들었다. 그녀를 닮았다는 노란 프리지아 한 송이, 그 한 송이도 집어들었다. 그리고, 바다에 던졌다. 그리고, 생각한다. 다시 천년이 지난 뒤 여기오면 그땐 그녀가 저 노란 프리지아 한 송이를 들고서 날 기다릴꺼라고...그리고, 돌아서 걸어나왔다. 슬픈 몸짓의 갈매기를 두고서...

그래 그냥 걸어나왔다. 너무 추웠고, 너에게 화도 나고, 하지만 슬프진 않았다.
오지 않을거라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했었지만 그래도 약속이니까, 어쩌면 천년전의 약속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정말 들었으니까!
내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걸까 아니면 영화 속에 빠져서 살고있는 사춘기 소년일까?

할 말이 정말로 많았는데 이렇게 시작하고 보니까 막상 쓸 말이 없구나.
애써 지우려 하지 않아도 지워지겠지만 우리 서로에게 추억으로 남겨질 순 있겠지.

지금 이 순간 널 때려주고 싶다면 이게 나의 가장 솔직한 심정이겠지.

언젠가 널 생각하며 써 두었던 글들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제 쓸모없게 되었구나.

말이 길어지니까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 여기서 줄일께.
흔히들 얘기하더라 이별하는 서로를 위해 ‘행복해라’고.. 그 말이 이해가 안 되었는데 이제서야 이해가 조금, 아주 조금 가는구나.
행복해라. 행복하게 살다가 천년이 지난 후에 그땐 내 곁으로 돌아와 주길 바란다.
돌아와 줄 수 있겠지?

1998년 4월 1일 천년을 기다린 남자가 다시 천년을 기다리며 여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