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을 뿐 걷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찾은 사회대 303호. 바로 과방 옆 강의실이다.
하늘 저 위에서부터 먹물이 스며들어 꼼꼼히 세상을 적셔놓은 때, 그 먹물이 켜진 불빛들과 조화를 이루고 그렇지 않은 곳은 검게 물든 이 때가 되면 왠지 우수에 젖어도 보고 고독도 씹어보고 싶고 그런걸까?

늘 그렇듯이 제각기 놓여진 의자들이 반갑다. 창문을 연다. 한 쪽 커튼을 살짝 걷어 젖히고서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어본다. '법대다. 365일 불꺼지지 않는 법대 4층, 아마도 고시원일꺼야' 혼자말인 듯 생각하며 밤 공기 크게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 뱉는다. 멋없다. 법대 건물은 참 멋없다. 건물 동편의 사람, 건물 서편의 사람이 서로 불평할까봐 정확히 한 가운데에 계단이랑 통로가 있다. 참 멋없지.

계단을 지나쳐 동편에서 서편으로 가는 사람, 계단 창가에 서서 자판기 커피쯤으로 보이는 것을 마시는 사람, 오르내리는 사람 참 많다.
저 꼭대기 4층에서부터 한사람이 내려간다. 여학생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이쪽을 마주해서 내려오더니, 다시 반대편으로 등지고 내려간다. 한 층을 내려왔는가 보다. 다리가 보이고 잠시 후 얼굴이 보이고 그렇게 마주해서 내려오더니 맞은편으로 사라진다. 또 한 층을 내려왔나 보다.
그렇게 보이다가 보이지 않다가 해서 1층까지 내려온다. 위태위태한 걸음을 지켜보기라도 하듯, 사모하는 여인의 총총걸음을 훔쳐보듯 그렇게 멀어져가는 여학생의 뒷모습까지 본다.

아! 먹물 속에서 한 줄기 밝은 빛이 나를 엄습하더니 답답한 가슴 뻥 뚫어놓고 머릿속을 휘휘저어 생각의 찌꺼기들을 가지고서 사라진다. 일순간이었다.
그래 그렇다. 보이지 않았을 뿐 여전히 걷고있는 내 모습을 나는 보았다. 계단을 내려오던 여학생이 맞은 편 계단으로 내려갈 때는 보이지 않던 것처럼, 하지만 그 보이지 않던 곳에서도 여전히 걷고있던 것처럼, 그래서 다시 마주하는 계단에서 보이던 것처럼 말이다.

나 또한 보이지 않을 뿐 걷고 있었던 것이다.
4층에서 1층까지 보이다가 보이지 않다가 하면서 내려왔던 그 여학생처럼 말이다.

나는 누구일까? 지금 내 모습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동굴탐험을 했던 한동안 정체성에 대해 반복되는 고민을 즐겼다. 그 고민의 동굴탐험에서도 나는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단지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다시 찾게될 출구의 희미한 밝음이 내 눈앞에 나타날 때쯤 나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걷고 있었다는 것을...
동굴입구의 희미한 불빛을 찾지는 못했어도, 이제 반복되는 정체성의 고민 가운데에서도 당당히 '나는 걷고 있다' 위안할 수 있겠다. 기쁘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 적고 있나보다. 지금.